이운학 - 첫사랑 캘리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30. 21:55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이운학, 첫사랑

더위에 땀을 식히려고 물을 틀어 온몸에 온수와 냉수를 뿌리다가, 생각이 첫사랑의 이름에까지 도달해서 생각나는 짧은 시를 적어보았다.
직설적으로 그 감정이나 시어에 대해 명시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건만, 나도 사람인지라 모순된 존재이고, 가끔은 그런 시도 생각나서 찾아읽고 주변에 이 시를 아느냐 물으며 추천하곤 한다.
사랑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하는 무거운 단어들은 쉽게 쓰기 힘들다는 게 인식으로 박혀있다. 그래서 그것은 무섭거나 더러운 것도 아니면서 우회적으로 완곡어를 써야겠다 마음먹게 만드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랑과 첫사랑은 또 달라서 이 단어만큼은 직설적인 것만큼 와닿기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 말이다.

처음에는 첫사랑의 그대가 꺾어준 꽃이 다시 필 때까지 들여다 보았다고 해서 이정하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아래 링크 클릭 시 이동)
이정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관련글
'찬 비에 젖어도 새 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부분과 유사하지 않나 싶어서 생각난 것이다. '꽃은 폈다가 지고, 다시 철이 되면 피니까'라며 자연처럼 반복해서 끝없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대가 남기고 갔다 했으니 이운학의 시에서도 그대는 지금 없고, 이정하 시에서의 그대도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지는 않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홀로 사랑하는 상황.
그래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모란이 다시 피기까지 삼백예순날을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라고 한 김영랑이 다음해 집 뒷마당에 모란이 또 필 것을 기다리겠다고 한 것도 잠시 생각났다. (잠시 삼천포지만, 영랑생가는 제곱미터로 4000이 넘고 평당으로 계산하면 천평이 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넓은 집에 화중왕 모란이 얼마나 아름다운 군집으로 피었겠는가. 그리고 또 화무십일홍이라고 대엿새만에 져버리고 말았겠지. 섭섭해 울 만도 했다. 그렇다고 어찌 삼백예순날씩이나? 과장법이지. 이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해놓고 과장으로 내리깎기에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숴야 하지 않나.)
그렇게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대가 준 꽃은 꺾었다하였으니 파낸 것 같지 않고, 시들 때까지 보았다하니 더더욱 옮겨심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남기고 간 시든 꽃이 다시 핀다고? 그렇게 다시 필 때까지 들여다본다니.

그 꽃은 아직 시들어있을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그리고 영영 다시 피진 못할 것이다.
꺾여져 더 아름답게 향기를 뿜을 기회도 박탈당한 꽃이다. 그대와 나의 사랑도 이미 꺾였다.
그럼에도 그 꽃이 필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라니. 들여다보네 라고 해야 맞겠지. 여전히 봐야하니까. 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마터면 끝까지 속을 뻔했다. 마치 그 꽃이 다시 핀 것처럼 들리는 과거형 어조에.

항상 보고있지 않더라도, 못하더라도, 이따금씩 들여다보고 있을 것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확신한다.
첫사랑이란 더욱이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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