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시 캘리그라피 (필사) - 낮은 곳으로, 사랑의 이율배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27. 00:13

저 한 문장만으로도 매우 유명한 시인 이정하. 시 원문의 제목은 낮은 곳으로. 캘리를 하려니까 역시 '물처럼' 부분 때문에 바다사진을 사용하게 되었다. 건네받은 직접 찍었다는 파도치는 외국바다 사진.

좋으니까 직접 그린 그림과 캘리그라피 한 장 더. 노트5를 산 이유 중 하나는 역시 s노트로 그림도 그리고 캘리도 하기 좋아서.

너무도 유명하지만 전체를 싣자면,

'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

직설적으로 말하는 목소리마저 좋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너.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고 낮은 곳에서 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물처럼 찰랑거리며 고여들 사랑.
사랑을 받을 수록 나의 빈 곳에는 너의 사랑으로 차오를 것이다. 차오르다가 못해 그 사랑만으로 채워질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 속으로 채워지다 못해 흘러 넘쳐서, 나라는 존재를 감싸는 공간마저 잠기게 할 물처럼 흘러드는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
사랑은 사람을 어디까지 침잠하게 허락할 것인가.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싶다고 말하는 절절함은 '사랑의 이율배반'에서 다른 분위기로 역전된다.

역시 벚꽃피던 계절에 직접 찍은 사진. 새 폰트를 사자마자 서체 적용해서 글을 입혔다. (dain 책방산책입니다. 예쁘죠? 사세요. 단돈 3.5)
바람에 간간이 흔들리던 꽃나무는 손 흔드는 그대와 닮았다. 내 속도 모르고.

'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이정하, 사랑의 이율배반
'

이율배반. 안티노미.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동등한 근거로 성립하면서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명제 사이의 관계.'

너와 내가 있는 공간과 시간과 상황과 모습은 동등한데, 왜 너는 눈부시고 나는 눈물겨운가. 같은 사랑일까. 쌍방의 사랑이라고 먼저 말해야겠지. 그래야 이율배반이라는 이 멋들어진 철학용어가 힘을 얻기 쉬우니까.
그런데, 그래도 짝사랑이라고 봐진다. 떠나면서 내게 손 흔들어주는 그대는 눈이 부시게 웃으며 안녕!잘 있어!하고 크게 소리치고 있을 것 같아서. 혹은 너와 나의 공간인 동네이든 학교든, 나에게 그대와의 추억을 같이 한 곳에서 떠나는 상황이니. 그대가 꿈이라도 찾아간 것일까.
그대와 나는 같은 상황임에도 긍정적인 눈부심의 밝음과 눈물겨움의 슬픔으로 양분된다. 그것은 말하는 '나'에겐 사랑이니까. 기약 없는 떠남이라, 그대는 언제라도 이 곳에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오지 않겠다거나 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라도 했다면 남은 내가 기다리지 말자고 다짐이라도 하지. 오히려 기약없는 그 안녕은 남은 이의 기다림을 종식시켜 줄 수가 없다.

언제 볼 지는 몰라도, 또 보자는 인사는 내게도 사무치는 말이다. 내게 다가오는 뉘앙스는 그렇다.

사실 앞선 시보다 이 시가 더 먼저 발표되었다. 먼저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역시 유명한 시로 손에 꼽히는데, 시집 제목이 이미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니까. '낮은 곳으로'가 더 먼저 써진 것이라면 조금 더 아프지만 공감이 될 것 같다. 너의 사랑을 다 받아준다고 나를 비울 각오도 했는데, 기약 없는 이별로 눈물겨운 '나'의 뒷모습을 그리는 것. 이것은 고약한 심보겠지. 별 수 없는 개인경험의 반작용이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가 함께 실린 이후의 시집.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잉크가 부족해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 다시 충전하고 시원스레 휘갈긴. 휘갈겨도 되는 분위기.

'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 비에 젖어도 새 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 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짝사랑을 해본 사람으로서, 끝의 끝을 보게되면 정말 이렇게 된다. 좋아한다고, 관심이 있다고, 내 눈길이 좇고 있는 것은 그대라고 절대 말하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 한 번을 건네지도 못하면서. 있는 티 없는 티, 사랑의 기척은 다 내놓고 감정의 발산을 못 막아내놓고는 또 자기위안으로 그대에게 내 사랑을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그것이 괜찮다의 의미겠지만, 조금 무섭게라면 '그렇게 아는 척은 안하겠다고? 그래도 나는 네가 좋은 걸.' 이렇게 말해야겠지. 짝사랑하는 사람의 자세다.
혼자 하는 사랑은 시작도 끝도 자신에게 달려있다.
한번 붙은 불길은 시도조차 하지 않아 절망감마저 맛 볼 기회 없어 눈물지을 새도 없고, 번져가기만 잘도 번져서 활활 탄다. 비에 젖고 구름이 가리어도, 새 잎이 돋아나고 별이 뜬다. 자연의 섭리대로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엉망진창으로 얘기해볼까. 네가 뭘하든 나의 입장에선 이 사랑이 당연하게 지속된다는 거지.

그만큼 외길 짝사랑은 홀로 완벽하다.

과연, 공감이 클 수록 내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시인에 속한다. 이 시들보다 덜 유명해도 훨 더 좋아하는 시가 더 있는데, 그건 이정하 시 2로 제목달고 들고 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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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 - 무화과 숲 캘리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25. 23:59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황인찬 시인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 에 실린 유명한 시
'무화과 숲'을 캘리그라피 ...라기 보다 필사했다.
백색 감성이라 불리는 그의 시들 중 이 시가 내게 가장 첫  시로 자리잡았는데, 아직까지 다른 시를 펴기 싫다.
이 시는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여린 과육 속을 파내어 부드럽게 씹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라서.

쌀을 씻다 잠시 창 밖을 보고 그 사람이 걸어갔던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봤다. 숲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길.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그는 숲속에서 죽었다는 얘기일까? 아니, 숲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갔을지 모른다. 그가 갔던 길을 잠시 걸을까하는 생각은 곧 먹을 저녁을 지으려고 쌀을 씻는 행위에 가로막혔을테다. 그리고 저녁을 먹어야지라며 자신의 일상을 되뇐다. 그러면서 내일은 내일 아침을 먹겠지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는 집 안에서 나가지 않고서 저녁을 먹고, 잠에 든다. 혼나지 않는 꿈. 그를 생각한다고 해서 혼나지 않을 꿈. 잠든 이가 꾼 것은 그가 숲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떠났던 그 길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꿈이었을까. 어쩌면 그저 그가 숲으로 가기 전의 둘의 추억을 되풀이하는 꿈일지도.

어쩌면 저번 시에서 소개했던 나태주 내가 너를 이라는 시와도 살짝 닮은 느낌을 받았다. 시풍, 시어가 아니라 내가 느낀 감상이 닮은. 너 없이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화과 숲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꿈을 밤마다 꾸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미 곁에 없는 사람을 그리는 것.

내게서 태생적으로 닮아있는 그 딸꾹질 소리와 이 시가 또 닮아있어서, 나는 이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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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단편집 타인에게 말걸기 中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오늘의 노트5를 사용한 캘리그라피를 같이 첨부.
직접 찍은 사진을 갤러리에서 골라내서 슥슥.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책 소개로 이동합니다.)

소설가 은희경의 작품을 가장 처음 접했던 책이다. 타인에게 말걸기. 당시 과제가 이 중단편집 속 한 작품이어서, 그 작품만 두 번 세 번씩 정독하고 속독하고 발췌독까지 했었다. 그녀의 세 번째 남자. 그 세 번째가 정확히 누구를 가르키는지 해석의 방향을 잡는데 고민했었다.
그렇게 접했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으로도 충분하다. 의무심으로 대해야하는 책이 생기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조금 망설일 때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스포주의?)

'겨울밤의 정적 속으로
매해 참아오던 폭설처럼
당신을 덮겠다.'

막 시작해서 아직 이렇다 할 커다란 진척이 없는 연인관계 . 선술집이었는지 포장마차였는지 술을 마시러 간 상황.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 밤!을 말하고 싶어 저렇게 적은 쪽지를 그녀의 잔으로 괴어 마음을 전하려한다. 얼마나 시적이랴. 참아오던 마음의 절절한 토로는 정적을 깨고 알아달라 외친다.
세상이 눈에 덮였을까. 눈이 세상을 덮었을까.
두 문장이 같아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느껴질 수 있다. 앞선 상황은 이미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게 변한 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고, 후자는 눈이 아직 한참 내리고 있는 동적인 이미지가 부각된다. 하물며 폭설처럼 덮겠다고 했다.
물론 이 서정적인 메모는 그녀의 실수로 맥주잔에서 쏟아진 물기 탓에 번져버리고 만다. 불길하게 보이겠지만  번지는 것쯤은 문제될 것 없었다. 다만 문장 속 단어 하나가 가진 이중적 성격이 이미 그들의 말로를 예언해버리고 만다.
폭설의 이미지는 온세상을 새하얗게 만들고 눈의 절정으로 이루어진 광경을 자아낼 수 있다. 하지만 폭설로 내린 눈의 양이 녹는 것은 순간이고, 그 눈이 녹아 질척해진   진창은 흙탕물처럼 불편함만 자아내 치워야할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제목처럼 특별한 연인이나 위대한 연인은 흔치 않다. 더욱이 특별하고도 위대하기까지한 연인은 더 힘들 것이다. 이야기 속 연인이 되었던 남녀가 특별하고 위대할까? 아니라는 답에 한 표 던지고 싶다. 그들도 그저 평범한 연인관계를 맺었던 남녀일 뿐이다.

그럼에도 로맨틱하게 보이거나, 번지는 것으로 안타깝게 만들거나 하는 메모 속의 저 문구가 너무 좋아 사진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을 했다.
내 마음에 저런 문장 하나 둘씩 새겨지는 건 그럴 때 더 쉬워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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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으로 하는 캘리그라피

기록/취미 2017. 7. 11. 17:46
취미로 하기엔 좋은 도구인 갤럭시노트 5
펜이 있는 노트 시리즈의 활용도가 가장 배가 되는 때.


이정록 시인의 더딘 사랑 중.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달이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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