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나 - 모과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19. 01:00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서안나, 모과

어느 소설을 읽다 연재 중 그 작가님의 후기의 소개로 알게 된 시.
내 첫사랑은 먹지도 못하고, 아니 베어 물려는 시도조차 못하고서, 바라만 보았고, 내 속의 감정에서 맡는 그 향기는 뚝뚝 떨어져 진딧물 고일 단내가 사방팔방 풍길 그런 첫사랑이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에 붙일 변명이 너무 많았음에도,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썩어버린 것은 내게서만큼은 일반적인  관계맺기의 실패나 부정 혹은 부재가 아니라,
홀로 곪아드는 속쓰림이었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것은 잘 익은 과실을 위해 따먹을 때를 기다리다가 시기를 못맞춰 낙과가 되어버린 타이밍일지도. 달디 단 과일도 썩게 된다.

나무에서 딴 과일일지 따기 전 과일일지 모르지만, 내 첫사랑은 자각만으로도 수확해놓고 바구니에 담아 정물화 그리는 화가처럼 감상했던 터라, 저 그림에 캘리그라피도 아닌 끄적거림을 하면서. 다시 읽어도 와닿는 시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 시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진정한 첫사랑이겠지.

첫사랑보다 첫 짝사랑에 가깝겠지만, 사랑노래와 사랑시의 시작은 첫사랑 아니겠는가.

겨울에 차로 타 마셨던 모과청 향내가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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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퍼센트의 진실성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19. 00:24
-10퍼센트의 위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이 섞인 문장 혹은 문단이 존재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2000년대 이후에도 활동이 있으신 시인 분들의 시도 좋고, 교과서에 나오는 근현대시의 시인들도 좋다.

덜 유명한 시도 좋은 시가 있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나는 더 좋아하는 시도 있으며, 누구나 알아도 정이 가지 않는 시가 있기도 하다.

덜 유명한 시인의 유명한 시와 유명한 시인의 덜 유명한 시는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역시 나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상하면 그뿐.
이 곳은 내가 좋아하고 곱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수집처가 되기 때문에.

다섯손가락에 드는 시인들은 언급이 되겠지만, 순위는 직접 밝히지 않을 것. 또한 그 다섯손가락에 드는 시인들의 명단이  2000년대 이후에도 활동이 있었다는 전제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들보다 더 좋아하는 시인이 생길 때도 있다는 것. 역시 개인의 취향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 진실된 마음.

무조건적인 추천은 아니며, 평이 있을 때도 있고 평 없이 원문만 실릴 때도 있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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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춘천편 bgm과 안도현 시 이야기

기록/일상생각 2017. 7. 16. 02:23
용산역에서 춘천으로 가는 청춘선 열차에서 알썰신잡이라며 했던 얘기가 끝날 즈음 나온 노래가

이 노래 (언니네 이발관, 영원히 그립지 않을 시간)

어쩜 미리 글을 적어 놓아서 알았지. 미세하게 흘러가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이 음악일 줄이야. 역시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만큼 보인다.

그리고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활자본으로 찍을거냐고 물으며 얘기 꺼낸 유시민 작가의 스치듯 나온 단어 연탄재...

또한 여기 이 글

뭔가 느낌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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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단편집 타인에게 말걸기 中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오늘의 노트5를 사용한 캘리그라피를 같이 첨부.
직접 찍은 사진을 갤러리에서 골라내서 슥슥.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책 소개로 이동합니다.)

소설가 은희경의 작품을 가장 처음 접했던 책이다. 타인에게 말걸기. 당시 과제가 이 중단편집 속 한 작품이어서, 그 작품만 두 번 세 번씩 정독하고 속독하고 발췌독까지 했었다. 그녀의 세 번째 남자. 그 세 번째가 정확히 누구를 가르키는지 해석의 방향을 잡는데 고민했었다.
그렇게 접했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으로도 충분하다. 의무심으로 대해야하는 책이 생기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조금 망설일 때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스포주의?)

'겨울밤의 정적 속으로
매해 참아오던 폭설처럼
당신을 덮겠다.'

막 시작해서 아직 이렇다 할 커다란 진척이 없는 연인관계 . 선술집이었는지 포장마차였는지 술을 마시러 간 상황.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 밤!을 말하고 싶어 저렇게 적은 쪽지를 그녀의 잔으로 괴어 마음을 전하려한다. 얼마나 시적이랴. 참아오던 마음의 절절한 토로는 정적을 깨고 알아달라 외친다.
세상이 눈에 덮였을까. 눈이 세상을 덮었을까.
두 문장이 같아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느껴질 수 있다. 앞선 상황은 이미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게 변한 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고, 후자는 눈이 아직 한참 내리고 있는 동적인 이미지가 부각된다. 하물며 폭설처럼 덮겠다고 했다.
물론 이 서정적인 메모는 그녀의 실수로 맥주잔에서 쏟아진 물기 탓에 번져버리고 만다. 불길하게 보이겠지만  번지는 것쯤은 문제될 것 없었다. 다만 문장 속 단어 하나가 가진 이중적 성격이 이미 그들의 말로를 예언해버리고 만다.
폭설의 이미지는 온세상을 새하얗게 만들고 눈의 절정으로 이루어진 광경을 자아낼 수 있다. 하지만 폭설로 내린 눈의 양이 녹는 것은 순간이고, 그 눈이 녹아 질척해진   진창은 흙탕물처럼 불편함만 자아내 치워야할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제목처럼 특별한 연인이나 위대한 연인은 흔치 않다. 더욱이 특별하고도 위대하기까지한 연인은 더 힘들 것이다. 이야기 속 연인이 되었던 남녀가 특별하고 위대할까? 아니라는 답에 한 표 던지고 싶다. 그들도 그저 평범한 연인관계를 맺었던 남녀일 뿐이다.

그럼에도 로맨틱하게 보이거나, 번지는 것으로 안타깝게 만들거나 하는 메모 속의 저 문구가 너무 좋아 사진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을 했다.
내 마음에 저런 문장 하나 둘씩 새겨지는 건 그럴 때 더 쉬워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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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0) 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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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노을 사진을 보며. 어린왕자가 생각났다. 곧바로 집에 있는 책을 펼쳐들어 자신만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조금씩 옮겨 그 석양을 계속 봤다는 구절 아래 '나'와 어린 왕자의 대화.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는 동화 혹은 소설의 재미와
어른이 된 눈으로 행간에 걸쳐있을 현실마저 읽어내며 생각하게 만드는 글의 재미가 또 사뭇 달라서 좋은 책.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깝지 않을까. 이 책에서 어린왕자가 B612 소행성에 살고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메르헨이며, 타 행성의 주인들은 물론이고 말하는 장미와 여우까지도 직접 접해볼 수 있는 인간 군상 속의 표집들이기 때문이다.

짧은 단락 속에서도 대답이 없는 어린 왕자의 모습이 퍽이나 누군가를 닮아 오래간만에 다시 읽어야되겠다고 또 결심하고 책장에서 책을 빼내어 놓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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