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 - 무화과 숲 캘리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25. 23:59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황인찬 시인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 에 실린 유명한 시
'무화과 숲'을 캘리그라피 ...라기 보다 필사했다.
백색 감성이라 불리는 그의 시들 중 이 시가 내게 가장 첫  시로 자리잡았는데, 아직까지 다른 시를 펴기 싫다.
이 시는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여린 과육 속을 파내어 부드럽게 씹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라서.

쌀을 씻다 잠시 창 밖을 보고 그 사람이 걸어갔던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봤다. 숲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길.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그는 숲속에서 죽었다는 얘기일까? 아니, 숲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갔을지 모른다. 그가 갔던 길을 잠시 걸을까하는 생각은 곧 먹을 저녁을 지으려고 쌀을 씻는 행위에 가로막혔을테다. 그리고 저녁을 먹어야지라며 자신의 일상을 되뇐다. 그러면서 내일은 내일 아침을 먹겠지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는 집 안에서 나가지 않고서 저녁을 먹고, 잠에 든다. 혼나지 않는 꿈. 그를 생각한다고 해서 혼나지 않을 꿈. 잠든 이가 꾼 것은 그가 숲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떠났던 그 길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꿈이었을까. 어쩌면 그저 그가 숲으로 가기 전의 둘의 추억을 되풀이하는 꿈일지도.

어쩌면 저번 시에서 소개했던 나태주 내가 너를 이라는 시와도 살짝 닮은 느낌을 받았다. 시풍, 시어가 아니라 내가 느낀 감상이 닮은. 너 없이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화과 숲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꿈을 밤마다 꾸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미 곁에 없는 사람을 그리는 것.

내게서 태생적으로 닮아있는 그 딸꾹질 소리와 이 시가 또 닮아있어서, 나는 이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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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 - 풀꽃, 풀꽃2, 풀꽃 3, 내가 너를.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23. 23:06

이 캘리그라피 사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2012년 봄 서울 광화문 한 건물에 걸렸던 플래카드 이미지다. 기사 참조

그 이후 이 그림이 사용되어 제작된 카톡 테마도 봤었다. 간결하고 정갈해서 사용했던 기억도 난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

나태주 시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하고싶은 말을 다 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 말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만, 그 짧은 몇 마디로 이미 충분히 완성된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짧아서 잘 외워지는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머릿속에 잘 박히는 감성이 자리잡고 있고, 또 내게는 가슴 속에 피어나는 문장이 되었다.

이 시 이후로 나태주 시인의 다른 시를 찾아보기까지 했으니 어찌 한 손에 꼽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굳이 찾아보지 않았더라도 지나치며 읽은 글귀에 그 이름 석자가 걸려있으면 원문을 찾아보려 마음 먹곤 했다.
물론 저 유명한 시가 풀꽃 1 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후의 일이다. 풀꽃 2, 풀꽃 3도 시선집에 실려있다.
나태주 시선집 - 풀꽃 은 이 링크로.

'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나태주, 풀꽃2
'
'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나태주, 풀꽃 3
'
물론 나는 위 3편 중에서는 원래 알던 풀꽃이 가장 좋다. 직접 만년필을 꺼내 손캘리를 할만큼.

여전히 너무 시원해보이는 필체. 만년필이 너무 무거운 탓을 한 번 해야지.

또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다른 시. 내가 너를.

손 캘리그라피 버전과

직접 찍은 사진에 텍스트 입힌 한 장. 한동안 폰 잠금화면이었다.

'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나태주, 내가 너를
'

시의 마지막 구절,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는 그 부분이 너무도 공감이 되어 한동안 먹먹해서.

이별 후에 너가 없는 상황일까, 혹은 너를 좋아한다 말하기도 전에 너와 멀어진 상황일까, 혹은 영영 간 너 때문에 너 없이도 여전히 좋아해야 하는 것일까.

다른 좋은 시는 또 다음번에 나태주 시 2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할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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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지난 일기 - 어플 씀 관련.

기록/일기 2017. 7. 22. 23:20
나는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시를 쓰는 것이 다반사고, 느리지만 장편소설을 적기도, 불태운 단편소설을 적기도 하며, 가끔 뱉아내듯 경수필과 에세이 그 어디쯤의 날 것의 생각을 쏟아내기도 한다.
의무감이 필요하다고 잠깐 느꼈다가, 영감을 건드리는 일은 무얼로 채워야하나 하는 차에 '일상적 글쓰기 : 씀' 이라는 어플을 알게 되었다. 작년 11월 말쯤 시작해서 이제껏 꽤 많이 적었다.

인스타에도 한 때 추천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주제어가 꿈이라서. 잠의 꿈일지 이루고 싶은 목표의 꿈일지는 내 자의적 해석에 맡겼는 데다가, 난 두 가지 중 어느 쪽으로든 말할 거리가 많은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어제, 평소 하루 두번 7시 4분마다 울리는 알림이 아닌 어중간한 오후 시간인 세시 언저리. 정각보다 조금 빨랐던가. 데이터를 켜니 이미 몇 분 전에 시작된 이벤트가 내게 조급증을 도지게 했었다.

종이책을 만들어준다니! 개인공간이면서도 공개를 해서 남들이 자신의 글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블로그 형태의 어플이었는데, 책으로 인쇄되어 나온다니 굉장히 두근두근했다. 게다가 정식으로 앱에 기능이 추가된다고 해서 일순간 1인출판이나 독립출판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선착순 20명. 안 될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모음에 서른 편 가까이 발행해놓았던 상태라,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모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글 몇 편을 더 추가했다.

수령지까지 입력이 끝나고 얼마 후 다시 신청 버튼을 누르니  마감 문구가 뜨길래 제대로 되었다 싶어 안심.

공저자랄까 단체의 일원으로서 발행한 작은 잡지형식의 문집은 여러 권 인쇄해서 받아봤지만, 내 이름만을 건 종이책이라니. 가슴이 뛴다. 비록 저 어플에서만 사용하는 필명으로 적혀 나온다 하더라도 나 혼자만의 독립 개인출판 느낌이 나서 싱숭생숭 설레는 떨림.

어서 왔으면.

씀 인스타 와 그것보다 더 업뎃이 빠른 씀 페북계정 (링크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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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20

기록/꿈일기 2017. 7. 22. 22:52
-너에게서 한 번도 스스로 하지 않았던 말을 들었다.

손이 어쩌면 이렇게 작고 예쁘대?
그리고 깍지낀 우리의 손.
앞뒤로 흔드는 팔에서 웃음꽃이 폈다.
그 큰 손에 한 움큼 다 쥐어진 손이 따뜻해서.

-평소에 얘기해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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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모과

마음대로 다시 읽는/시 2017. 7. 19. 01:00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서안나, 모과

어느 소설을 읽다 연재 중 그 작가님의 후기의 소개로 알게 된 시.
내 첫사랑은 먹지도 못하고, 아니 베어 물려는 시도조차 못하고서, 바라만 보았고, 내 속의 감정에서 맡는 그 향기는 뚝뚝 떨어져 진딧물 고일 단내가 사방팔방 풍길 그런 첫사랑이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에 붙일 변명이 너무 많았음에도,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썩어버린 것은 내게서만큼은 일반적인  관계맺기의 실패나 부정 혹은 부재가 아니라,
홀로 곪아드는 속쓰림이었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것은 잘 익은 과실을 위해 따먹을 때를 기다리다가 시기를 못맞춰 낙과가 되어버린 타이밍일지도. 달디 단 과일도 썩게 된다.

나무에서 딴 과일일지 따기 전 과일일지 모르지만, 내 첫사랑은 자각만으로도 수확해놓고 바구니에 담아 정물화 그리는 화가처럼 감상했던 터라, 저 그림에 캘리그라피도 아닌 끄적거림을 하면서. 다시 읽어도 와닿는 시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 시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진정한 첫사랑이겠지.

첫사랑보다 첫 짝사랑에 가깝겠지만, 사랑노래와 사랑시의 시작은 첫사랑 아니겠는가.

겨울에 차로 타 마셨던 모과청 향내가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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